지난번 F-14를 만든 뒤, 조금 슬럼프를 겪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F-14 완성작들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름 모형경력이 20년을 훨씬 넘는데, 왜 꼭 톰캣 앞에서는 작아지는 건지…
곰곰히 생각해보니, 너무 눈이 높았던 것이 문제였지 싶다. 너무나 유명한 기체, 너무나 유명한 마킹으로 만들다보니 자꾸 다른 제품, 다른 완성작들과 비교하게 되고… 그러면서 참신함과 개성을 잃고, 그러다 길을 잃으면 의기소침해지기까지 한 게 아닐까. 예전에는 ‘남들과는 다르게 만든다’는 나름의 자존심이랄까, 철학 같은 게 있었는데…
차기작도 이런 관점에서 고르게 되었다. ‘남들이 보지 못한, 적어도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아이템을 하자!’는 것. 그렇게 결정된 것이 Avon 엔진을 단 호주의 CA-27 CAC Sabre (a.k.a Avon Sabre) 였다. 9.17(금) 퇴근 후부터 작업 개시.
- CAC Sabre는 미국 North American사로부터 F-86 Sabre 생산 면허를 딴 호주 CAC(Commonwealth Aircraft Corporation)사가 만든 Sabre를 일컫는다. 이 기체는 오리지널의 GE J47 엔진과 달리, 영국제 롤스로이스 Avon(에이번) 엔진을 썼기 때문에, Avon Sabre라고도 불린다. (Spey 엔진을 단 영국형 F-4를 Spey Phantom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제식번호는 CA-27이며, Mk.30/31/32 등 총 100여대가 생산되었다.
1. 키트
이미 소개한 대로, 컨버전 키트는 2개를 모두 갖고 있다. 각각 Fujimi 키트와 Academy 키트를 베이스로 한다.
- Jays Model Kits #JY0114 CAC CA-27 Sabre (for Fujimi or Hobbycraft kit)
- High Planes Models #K 072 078 CAC CA-27 Sabre (for Academy kit)
HPM 제품을 쓸 예정이므로 아카데미 키트(녹색)를 쓸 계획이었는데, 인테이크 내부가 재현되지 않은 것이 영 찝찝했다. 혹시 몰라 Fujimi 키트(회색)를 열어보니 이게 웬걸… 덕트가 다 재현돼있고 몰드도 훨씬 깔끔하다.
“아카데미 키트는 몰드가 깔끔할 것이다”는 기대와 달리, Fujimi 키트의 몰드가 훨씬 더 선명하다. (아카데미 키트가 Fujimi 키트를 카피+개수한 것 같다) 결국, 계획을 변경해 Fujimi 키트를 기본으로 하기로 결정.
2. 컨버전 키트
리뷰 포스팅에도 썼지만, Jays 키트나, HPM 키트나 둘다 품질이 그저 그렇다. ‘쬐끔 더 나은’ HPM제를 쓰기로 결심했는데, 에어브레이크를 비롯한 동체 후방은 영 답이 없다. (가뜩이나 몰드가 엉성한데, 후방은 그게 더 심하다) 결국 베이스 키트인 Fujimi 키트의 후방을 이식하기로 결정.
- 이미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더라. CAC Sabre 사용국인 인도네시아의 모델러 Alexander Sidharta씨가 ARC에 올린 제작기.
꼼꼼한 분들은 이런 이식작업을 할 때 자와 톱을 사용해 공차를 최소화 하지만, 나는 니퍼로 대충 잘라내는 편이다. 1/72에서는 그게 빠르기도 하고, 어차피 메움+보강작업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식부품들이 대충 자리를 잡으면, 각재를 이용해 내측 접착부의 강도를 확보하고 수지접착제와 순간접착제를 발라 굳힌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베이스 키트를 다른 걸로 썼기 때문인지 오른쪽 앞 뒤 동체의 곡률이 서로 다르다. (왼쪽은 대충 맞다) 곡률을 맞추려고 오른쪽 앞 뒤 동체를 뒤틀면, 수직미익 좌우 부품이 엄청나게 벌어진다. 아무리 아카데미 F-86 키트가 Fujimi 키트의 카피품이라 해도, 미묘한 차이는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진퇴양난.
고민 끝에, 컨버전 키트를 Jays로 교체하기로 결정. HPM 키트보다 오래된 제품이라 품질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피장파장이다. 다만, (수직미익에서 보이듯) 무식하게 박아놓은 게이트들은 아무래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한참 게이트를 다듬고 있는데, 또 오기가 생겼다. Jays 컨버전 키트는 에어브레이크가 닫힌 상태인데, 베이스 키트인 Fujimi 키트를 이식하면 이걸 열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거다. HPM 키트에 붙어있던 놈을 다시 뜯어내서 재접착하기로 결정.
또다시 각재를 붙이고, 수지접착제와 순간접착제를 써서 두 부품을 결합시켜줬다. 조금 삽질을 하긴 했지만, 원래 Jays 키트는 Fujimi 키트가 베이스이므로, 위화감 없이 잘 맞는다.
3. 공기흡입구
Fujimi 키트를 쓰기로 한 이유는 바로 이것. 공기흡입구의 덕트가 재현돼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Seamless Intake는 언감생심이고, 밀핀자국과 싸워야 하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순간접착제로 밀핀자국을 메워줬다.
오리지널 F-86은 GE J47 엔진을 썼지만, CAC Sabre는 롤스로이스 Avon 엔진을 썼다. 엔진이 다르므로 콘(cone)도 달라져야 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키트 부품의 콘이 너무 못생겼다. 무슨 시라노의 코도 아니고…
- 사실 J47 엔진의 콘은 저렇게 생긴 것이 맞기는 하다. Fujimi 키트가 잘 재현한 것이지만, Avon 엔진의 콘과는 다르므로, 그대로 쓸 수는 없다.
하세가와 무장세트 1의 LAU-3 로켓런처 페어링을 유용하면…
이렇게 Avon 엔진의 준수한 콘이 된다.
덕트는 SMP하우스 SM107 Super Fine Iron, 콘은 SMP 067 Iron Silver로 에어브러싱.
4. Aden 기관포
CAC Sabre은 엔진 크기가 커지는 바람에 기존의 브라우닝 기관총 3문을 철거하고 30mm Aden 기관포 1문으로 바꿔달았다. CAC Sabre의 특징 중 하나인 건데, Jays 컨버전 키트의 이 몰드는 영 엉성하다. 디테일업을 전제로, 좀더 샤프하게 가공한다고 전동공구를 돌리다가 몰드가 날아가는 사태가 발생…
… 그리 나을 것도 없는 HPM 컨버전 키트에서 해당 몰드만 유용. (내가 이래봬도 일을 어렵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전동공구에 날아간 몰드는 되살린 셈이지만, 정작 디테일업이 더 큰 문제다.
5. 덩어리들
조종석+공기흡입구 뭉치에 무게추를 넣을 공간이 만만치 않다. 낚시용 납추를 바이스에 물리고 반으로 자르는 등 최대한 무게추를 작게+많이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컨버전 키트와 Fujimi 키트가 결합된 동체 좌우부품, 그리고 조종석+공기흡입구 뭉치. 주요 포인트는 아래와 같다.
- (동체 내측/외측) 에폭시퍼티로 틈을 메우고 강도를 보강
- (동체 내측) 컨버전 키트의 내측이 매우 두껍기 때문에 조종석+공기흡입구 뭉치가 원활히 결합될 수 있게 전동공구로 살을 파냄
- (동체 내측) 조종석+공기흡입구 뭉치가 원활히 결합될 수 있게 결합턱을 만들어줌
- (조종석+공기흡입구 뭉치) 반으로 잘라 크기를 작게 만든 낚시용 납추 2개(총 2g)를 미리 접착
6. 시트
시트는 체코 Pavla Models의 F-86용 T-14EA(#S72066)를 썼다. 원래 Airfix용으로 나온 제품이어 그런지 조종석 폭보다 좀 작게 나왔다. (커서 깎아내야 하는 것보단 낫지…)
Pavla Models는 원래 러시아 NeOmega 제품을 무단복제하는 것으로 영업을 시작한 회사다. (NeOmega가 예전 웹사이트에서 인상 쓴 고양이 사진을 걸어놓고 Pavla에 경고하는 글을 띄웠던 게 기억난다) 이제는 NeOmega보다 Pavla가 더 열심히+꾸준히 신제품을 내놓고 있으니…
7. 가조립
깎고, 다듬고, 맞춰보고…의 연속이었다. 하나도 제대로 깔끔하게 맞아들어가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이틀간 낑낑 댔더니 이렇게 ‘모양’을 확인할 정도까지는 됐다.
‘덩어리들’을 결합해봤다고 해서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CAC Sabre는 동체가 커지고 엔진이 달라졌기 때문에 동체 표면의 패널라인, 루버, 벤트 등이 죄다 다르다. Jays 컨버전 키트의 몰드가 썩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70%는 새로 만들어준다는 각오다. 이제 시작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