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올 때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모형취미를 좀더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겠네” 정도의 생각 밖에 없었다. 모형점도 많을테고, 전시회도 자주 열릴 거고… 그런 소박한 생각으로 지역IPMS에 가입했을 뿐인데, 어쩌다가 방송출연도 하게 되고, 뭔가 일이 자꾸 생기더니… 급기야는 콘테스트에서 상까지 받게 되었다.
가족들에게 부탁해 2020년에 만든 MiG-23MLD와 그 전년도에 만든 F-4E를 미국으로 가져왔는데, 얘네들이 상을 받아버린 것이다…
발단은 이렇다. 2월 첫 주, 지역IPMS에 가입하고 월례미팅을 나가보니 다들 작업중이거나 완성된 키트를 들고 오더라. 적어도 열 번은 더 나갈텐데, 매번 맨손으로 나가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지금 되돌이켜보면… 빈 손으로 오는 사람도 꽤 되는데, 내가 너무 소심했다) 그래서 미팅에서 돌아와서 동생과 가족에게 SOS를 쳤다.
“이번 봄방학 때 가족들이 미국에 놀러올 때 들고 올 수 있도록 완성작 2점만 잘 포장해서 보내줘…”
어떻게 포장하면 될지를 구상하여 스케치한 그림이 저거다. 동생이 저 그림을 보고, 설날 연휴에 우리집에 들러서 내가 부탁한 비행기 2점을 가져갔다고 한다.
약 일주일만에 뚝딱 포장을 완성하여 동생이 카톡으로 보내준 사진. 대만족!!! 미대 출신이라 그런가, 아니면 타고 난 건가… 나와는 다른 쪽으로 재능이 출중하다.
그리고 봄방학을 맞아 집사람과 두 아이가 태평양을 건너 들고온 비행기 2점. 피카츄 가방에 김치통 2개를 담아서 가져왔는데, 생각보다 커서 미안했다.
아무튼 요렇게 미국으로 옮겨온 비행기 2점을 갖고 미국 IPMS지부가 주최하는 콘테스트에 출전해봤다. 한창 모형에 불 붙었던 2004년(네오 컨벤션, 울프팩 사장님과 합동 참가)과 2006년(시즈오카 하비쇼) 이후로는, 결혼도 하고 완성작 옮기기도 힘들고 해서 행사에 일절 참석하지 않았는데, 거의 20년만의 행사 참석이고, 본격적인 콘테스트 참가도 이번이 사실상 처음인 셈이다. (찾아보니 2003년에 허접한 에어울프로 국내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정도니 그건 논외로 하자) 당시 20대 후반이던 총각이 지금은 50을 바라보는 아저씨가 돼있다…
참석한 행사는 다음과 같다.
- WrightCon 2024 (3.23(토)-3.24(일) / Dayton, 오하이오) – IPMS Region IV Convention을 겸함
- SEMMEX 2024 (4.27(토) / St. Clare Shores, 미시간)
참고로, 특별히 금지하지 않는 한, IPMS지부가 개최하는 전시회(콘테스트)는 다른 전시회(콘테스트)에 출품(또는 수상)한 작품의 재출품을 엄격히 막지는 않는다. (다만, 전국대회(National Convention)에서는 이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있다) 내 경우, SEMMEX 운영진에게 문의메일을 보내 WrightCon 수상작을 재출품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SEMMEX에 중복출품하였다.
MiG-23MLD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 IPMS 제4지역(Region IV) 컨벤션을 겸한 WrightCon에서는 1/72 스케일 제트기 부분 3등(Bronze)을, 그리고 SEMMEX에서는 1/72 단발엔진 부문 1등(Gold)을 수상했다. 특히 WrightCon이 개최된 오하이오주 Dayton은,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의 고향이기도 하고 미공군박물관과 라이트-패터슨 기지(Wright Patterson Air Force Base)가 있는 등 여러모로 비행기와 항공산업의 도시다. (100km 북쪽으로 닐 암스트롱의 고향인 Wapakoneta라는 도시도 위치해 있다) 여기서 열린 콘테스트에서 비행기 부문 상을 받은 것이 개인적으로 뜻깊게 느껴진다.
메달 아래의 종이는 각 콘테스트에 제출했던 출품작 설명지다. IPMS지부들이 개별적으로 개최하는 콘테스트라는 것이, 경쟁부문이나 제출양식 등이 엄격히 통일돼있지는 않지만, 느슨한 수준으로 공유되는 관행(practice)이 있다. “출품작을 심사(judging)할 때는 익명으로 한다”는 것이 대표적인데, WrightCon은 신상정보가 적힌 하단을 접도록 했고, SEMMEX는 설명지(신상정보 없으며, 전시테이블에 올려둠)와 출품목록(신상정보 있으며, 주최측 테이블에서 보관)을 각각 별도로 제출하게 한 것이 차이점이다.
3.23(토)-3.24(일) 양일간 개최된 WrightCon 현장에 전시되었던 모습. 둘에 들어간 노력이나 제작패턴은 비슷한데, MiG-23MLD만 상을 받아서 조금 의아하긴 했다.
현재 Wright Field Scale Modelers 웹사이트의 WrightCon 2024 결과 페이지에 가보면 각 부문별 출품작과 수상자들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아시겠지만… 1/72 제트기 부문의 출품작이 총 12점밖에 되지 않아 운이 좋았던 것 뿐이다.
SEMMEX 2024 현장에서의 모습. 1등(Gold)이라니… 심판(judge)들의 의견에 따르면, 또렷한 패널라인과 리벳, 부드러운 위장무늬 색감 등이 좋았다고 한다. 반면, 캐노피 실링이 너무 굵고, 주익의 연료탱크가 고정돼있지 않은 점이 감점요인이었다고. (이동을 위해 파일런에 자석을 심은 것이, 심사기준에는 오히려 부적합했나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R. V. Aircraft 키트로 고생고생해서 만들긴 했지만) 아쉬운 점도 많고, 무엇보다 이제는 Clearpropmodels에서 더 뛰어난 키트가 나왔기 때문에 언젠가 다시 만들 생각으로 ‘이건 미국 오다가 부서져도 괜찮아!’ 싶은 마음에 가져온, 말하자면 ‘버리는 카드’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상을 받아버리니, 참 사람이든 모형이든, 운명이란 건 알 수가 없다.
이번엔 2019년 완성작인 F-4E. WrightCon 2024에서는 수상하지 못했지만, SEMMEX 2024에서는 1/72 쌍발엔진 부분 2등(Silver)과 Best USAF/ANG Subject (최우수 미공군-주방위군 기종) 부분을 수상했다. 1/72 비행기 부분의 출품작이 몇 없었던 것에 덕을 본 게 큰 것 같다.
이것 역시 이실직고(以實直告) 하자면, ‘파손돼도 괜찮은’ 그런 완성작이어서 부담 없이 미국으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모형보다 더 큰 상패(plaque)까지 받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내 눈에도 좀 달리 보이는 것 같다. (???)
SEMMEX 2024 현장에서 찍은 모습. 규모는 WrightCon이 더 컸지만, 호응도는 SEMMEX가 더 좋았던 것 같다. 관람객과 출품자들이 내 MiG-23MLD와 F-4E를 보며 이런저런 질문, 칭찬, 수다를 건네곤 했다. 행사를 주최한 IPMS Warren의 멤버들도 이 낯선 이방인 수상자에게 우호적으로 대해줬고.
우리 클럽(IPMS CAMS) 회장님이 불참하시는 바람에 사진 촬영, 심사, 지부간 커뮤니케이션 등을 하느라 바쁘셨던 Chris K가 찍어준 수상 인증샷. 생각지도 않게 SEMMEX에서 상을 3개나 받는 바람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WrightCon 때 블레이저 입고 간 게 튀어보였나 싶어 이번에는 대충 츄리닝만 입고 갔는데, 그것도 후회되고… 나이가 들수록 의관(衣冠)이 깔끔해야 한다는 생각인데, 미국 와서 다들 편하게 입고 다니는 것만 보다가 방심한 건지…
아무튼 이렇게 미국에서 방송도 타고, 상도 받고… 생각지도 않은 재미있는 경험들을 하며 지내고 있다.
축하드려요. 역시 좋은 작품은 국경을 달리해도 통하지요 ^^
아휴, 감사합니다. 여기는 주 스케일이 1/48 이상인 것 같아요. 그만큼 출품작들도 많아지지만, 정주님 작품들이면 충분히 수상권에 드실 것 같아요. 월례미팅 때 하비페어 2024를 소개했는데 다들 놀라워하는 눈치였어요. 미국이나 한국이나 서로의 모형판(?)을 소개하고 교류하면서 서로 insight도 얻고… 그렇게 즐기면(enjoy!) 되는 분야니까요.
IPMS Korea 멤버시잖아요? 이번 7월에 있을 전미대회(National Convention)에 구경가려는데, 다녀온 뒤에 관람후기 공유 드릴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가족들이 여름휴가 오는지라 바로 후기 올릴 수 있을지…^^)
익명이라고 나오네요 슈발리에 정정주 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