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MS/USA National Convention 2024 (3)

간밤에 한바탕 소동을 겪어서였을까, 행사 마지막 날인데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그래도 오늘은 시상식이 있는 날이라 오픈 시간에 맞춰 아침 9시 20분에 행사장에 도착했다. 오늘의 일정은 아래와 같다.

  • 09:00 : 행사장 오픈
  • 10:00 : 각종 세미나 시작
  • 16:00 : 전시회장 폐쇄
  • 17:00 : 메이커 시장(Vendor Room) 폐장
  • 18:00 : 루프탑 만찬
  • 19:00 : 콘테스트 시상식
  • 21:30 : 전시회장 재오픈 (출품작 회수 목적)
  • 23:00 : 시설 전체 폐쇄

어제 오후에 출품작 평가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나보다. 오늘은 주요 수상작들에 표시가 되어있다.

모든 모형쇼마다 출품카테고리는 각양각색이지만, IPMS/USA 전국대회의 기준은 한번쯤 참고해볼만 하다. Aircraft, Military Vehicles, Figures 등 총 8개의 클래스가 기본이며, 만 17세 이하 Junior 클래스가 별도로 있다. 각 세부 카테고리별로 1, 2, 3위를 뽑고, 클래스별로 Best of Class를, 최종적으로 Best of Show를 뽑는, 그러한 체계다. 특정주제별로 통합하여 시상하는 Theme Awards(2024년도의 경우, 10개)는 별도다.

이 기준에 따라 직접 계산해보니, 출품 카테고리만 총 199개에 달하고, 각 클래스별로 1, 2, 3위를 선발하기에 (수상작 없는 카테고리도 있지만) 수상작은 600개 남짓이다. 놀라울 따름이다.

각 카테고리의 상패, 메달 등은 IPMS/USA 지부, 개인, 단체 등의 후원을 받아 제작하는 것 같다. 내가 활동했던 C.A.M.S도 주니어 부문(Class 0) 기타 장르: 12세 이하(#080 Miscellaneous: Pre-teen) 카테고리를 후원.

Best Aircraft 수상작, SB2A-3 Buccaneer.

아니, 이렇게 평범한 완성작이 Best Aircraft라고? 조금 이해가 안 되어 옆에 놓인 소책자를 살펴보니…

1/48 버큠폼 키트를 갖고 거의 자작을 하다시피 했다. 오래된 버큠폼 키트에 향수 내지는 호의를 가진 미국/유럽 비행기 모델러들의 보수적 관점과는 별개로, 이 출품자의 진지함과 열정은 Best Aircraft의 영예를 받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Best Military Vehicle 수상작. 1/35 IDF Fitter.

디테일이나 색감, 모든 것이 뛰어나다.

Best Figure 수상작인줄 알고 찍었는데…

이 분야의 문외한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Best Figure 수상작이라고 하기는 많이 부족하다. 나중에 Nats 2024 수상작 갤러리를 보고 나서야 ‘Best Figure’ 상패가 잘못 놓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공식 시상식이 열릴 때까지는 이런 혼란(?)이 종종 발생하곤 하는 모양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Class 306B (Dismounted: 71mm and Larger, 1900 to Present)의 1등 수상작일 뿐.

Best Ship 수상작. 찾아보니 미국 독립전쟁에 쓰인 USS Philadelphia함이라고 한다.

Best Automotive 수상작.

깔끔한 표면처리, 화려하진 않아도 기본이 탄탄한 디테일 등이 돋보이는 작품.

모형지 FineScale Modeler의 촬영부스. 지면(誌面)에 실어야 하는 사진이라 그런지 좀더 장비를 갖췄다. Nats 2024 팀도 수상작 갤러리 구축을 위해 사진을 찍기는 하지만, 심사와 병행해 시간에 쫓겨가며 찍다보니 이렇게 여유 있게 찍을 상황은 못 된다.

색감이 너무나 좋아서 찍은 Ki-46. 이 글을 쓰며 찾아보니 이 역시 Steve Hustad씨의 작품이다. Class 111 (Medium Prop Aircraft: 1/72) 1등 수상작. 디오라마 빌더로서 당연한 것이겠지만, 단품 제작실력도 발군(拔群).

클래스별 Best 작품을 훑어본 뒤, 공항에 가서 렌터카를 반납하고 왔다. Chris K가 같이 따라가줬고, 돌아오는 길에는 그의 픽업트럭을 타고 왔다. 추가 1박 없이, 오늘밤 시상식이 끝나고 다른 Chris와 함께 이 픽업트럭을 타고 6시간을 달려 미시간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여태까지는 약간 Solo traveler로서 편하게 다녔지만, 이제는 두 Chris 신세를 져야 한다!!

낮 시간에는 동호회 전시공간으로 가서 C.A.M.S 테이블을 철수. 나야 1/72 비행기 2개만 전시했지만, 트럭, 건담, 클럽 배너 스탠드 등 Chris K와 Chris L은 짐이 많다. (당연한 얘기지만, 구입한 물건들도 많다) 정리를 조금 도왔다.

저녁 7시부터는 시상식이 개최된다. 4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 하는 셈. IPMS/USA 매디슨 지부(Mad City Modelers)의 회장이자 이 Nats 2024의 총 책임자였던 Jeff Herne이 감사인사를 건네고 있다. 전국대회를 유치한 2년전부터 오늘 이순간까지, 그간의 노력들이 떠올라 감개무량 했을 것이다. 초대형 스폰서나 전문 행사인력도 없이, 오직 ‘좋아서 하는’ 자원봉사자들을 이끌며 미국 전역에서 오는 모형인들을 맞기 위해 온갖 행정과 서류와 씨름하며 매순간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을 총 책임자의 어려움을, 나는 상상하지도 못하겠다.

이 자리에서는 ‘올해(2023년도)의 IPMS/USA 회원'(IPMS/USA Member of the Year) 시상도 같이 열렸다. 놀랍게도 C.A.M.S의 회장인 Richard(Dick) D가 선정되었다. (Dick의 부인이 자꾸 연단 앞쪽으로 이동하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다) 시상자는 IPMS/USA 지부책임자(Director of Local Chapters)인 John Figueroa. 내가 Nats 2024 투어를 계획할 때 이메일로 도움을 받은 바 있는데, 직접 본 것은 오늘이 처음.

Dick의 수상은 새 지부(C.A.M.S)를 설립하고, 단 2명으로 출범했던 클럽을 몇 년새 20여명 규모로 비약적으로 늘린 공적이 인정된 것이다. 옆에서 1년간 지켜본 바로도, Dick은 랜싱(Lansing, 미시간 주도(州都)) 인근의 모형/서브컬쳐 관련 이벤트에 꾸준히 참석하고 관련 샵들과 교류를 이어가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실제로, 내가 C.A.M.S에 참석한 2024년 초 이후, 매달 정례모임마다 새 얼굴이 한 둘씩 늘었으니…

하지만, 이러한 IPMS/USA-wise한 관점 외에 Dick의 리더십과 인품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과장이라 말할지 몰라도, 지난 1년간 나의 미시간 생활, 그리고 C.A.M.S 활동을 비롯한 미국 모형계 탐험을 돌이켜볼 때, Dick의 도움과 호의에 빚진 것이 많다. Chris K, Chris L, Jason M, Bill H, Tony F, George E, Brad S, Michael B 등 모든 C.A.M.S 회원들과 잘 지냈고 고맙지만, 그러한 분위기를 이끌고 나를 클럽에 잘 융화되도록 많은 기회를 준 것은 오로지 Dick의 리더십과 배려 덕택이었다. 보수적이고 깐깐한 동부, 친절하지만 깍쟁이 같은 서부와 달리, Midwesterner들은 무뚝뚝해보이지만 정(情)이 있다는 속설을 그를 통해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동양인이 드문 미시간 중부, 그것도 가장 서구적인 취미라고 할 모형클럽에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긴장한 표정의 동양인을 따뜻하게 환대해주고 지역 모형쇼 참석을 격려하면서 프리젠테이션 기회를 주는 등, 나의 미국 모형계 탐험이 더 풍성해지는 데 Dick은 정말 큰 도움을 주었다. 다양한 클럽 이벤트가 모두 회원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부드럽고 너그러운 리더십과 성품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시상식은 맨 뒷줄에 앉아서 참관했는데… 내 옆자리의 미국인과 small talk을 피할 수 없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한국에서 군사고문으로 일했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서로 icebreaking을 시작. 플로리다에서 온 Robert K라는 모델러로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꽤 유명한 분. 모형 뿐만 아니라 분재(盆栽, bonsai)에도 일가견이 있더라. 이번 Nats 2024에도 동생과 함께 몇 점의 작품을 출품해서 수상도 했다.

다른 상들은 콘테스트 행사장에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대상(Best of Show격인데, 공식명칭은 Grand Award;라고 하나보다)은 시상식 맨 마지막에 발표한다. Foundation FTL Ship이라는 작품이 수상했다. Apple TV+에서 방송 중인 SF시리즈 파운데이션에 나오는 우주선이라고 한다. Faster-Than-Light ship, 또는 Jumpship이라고 하는데, 내가 파운데이션 원작이나 드라마를 몰라서 아이템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모조리 3D 프린팅으로 출력한 본체와 모듈, 내부에 광섬유 등을 가득 심어 심혈을 기울인 100% 자작품이라는 점이 대상 수상의 요인이 아니겠나 싶다.

출품자는 Bauble Young.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순간 환호성을 지르시더라. 상금 한 푼 없는 ‘명예’에 불과한 상이지만, 얼마나 감격스럽겠나. 이 분의 본명은 Changhuei Yang. 찾아보니 Caltech의 Biophotonics 교수시라고…;; Bauble Young은 모형인으로서의 ‘부캐'(副캐릭터; Alt)인 셈. 모형 관련 페이스북이나 인터뷰에서는 철저히 부캐를 유지하고 계신다. (어휴, 깜찍한 교수님일세…) 시상식이 끝나고 식장을 나가는 모형인들도 대상 수상자에게 저마다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2시간 넘게 진행된 시상식을 마치고 콘테스트 행사장이 밤 9:30에 다시 열린다. 출품작들을 회수하는 시간. 이미 회수-귀가한 사람들도 있어서 그런지 테이블이 조금 한적하다. 모노나 테라스는 밤 11시에 닫히기로 돼있다.

추가 1박 없이 미시간으로 가기로 했으니, 우리도 가야지. 왼쪽부터 Brad S, Chris K, Chris L. 미국에 와서 항상 타보고 싶었던 픽업트럭인 Ford F-150을 이런 기회에 타본다. Chris K의 차량. (부인 소유의 차량이라고 했던 것 같다) 2열 캡이라 나는 뒷 열에 앉았다.

Chris L가 먼저 운전대를 잡았다. Brad S를 호텔에 내려주고 셋이 6시간의 귀갓길에 올랐다. 위스콘신에서 미시간 호수를 따라 남쪽으로 쭉쭉 내려가 일리노이와 인디애나를 거쳐 북상하여 미시간으로 들어가는 코스. 운전을 맡은 Chris L에게 미안했지만 고속도로에 진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 깊이 잠에 빠져들었다.

3시간 정도 운전하고 휴게소에 들렀다. 운전은 Chris K와 교대.

초반 3시간은 정신 없이 잤지만, 후반 3시간은 그래도 바깥도 보고 하면서 왔던 것 같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가로등 같은 게 거의 없어서 밤에 운전하면 무섭기도 하고 적적하기도 하고 그렇다. 오로지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만 의지해서 그 넓은 도로를 달리다보면 여러가지 생각도 들고 한다. F-150 픽업트럭을 타고 4개 주를 거쳐 6시간의 드라이브라니, 참으로 미국적이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비행기편이 취소되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이런 경험을 해봤을까. 영어 표현으로 하자면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 아니면 ‘It’s not all good or all bad’ 인 셈이다.

미시간에 진입하자 칠흑 같은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오더라. 랜싱 옆 동네에 사는 Chris L 집에 먼저 들렀다. 주한미군으로서 Camp Casey에서 복무했던 경험으로 나에게 (Dick과는 다른 형태의) 우정을 보여준 Chris L 집에 가본 것은 이번이 처음. 바이크, 모형, 공구 등 터프가이다운 물건들로 가득 찬 그의 창고 안에 Nats 2024에서 구입한 그의 물건들을 내려주고 Chris K와 둘만 다시 차에 올랐다. 떠오르는 햇살을 보고 이제 집이 머지 않았구나 안심이 되더라.

아침식사거리를 사기 위해 집 앞 마트에 내렸다. 무사히 집에 온 것이다. 어제 렌터카 반납할 때도 그랬지만, 집에 돌아올 때도 Chris K에게 큰 신세를 졌다. C.A.M.S의 홍보와 IT 담당으로서, 나처럼 미시간 인근의 모형쇼들을 찾아다니며 쇼 취재와 클럽 홍보에 열심이었던 그 성실한 모습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지역 모형쇼에서 뜻밖의 큰 수상으로 얼떨떨해하는 나를 촬영해준 것도 Chris K였다)

생각을 조금 더 넓혀보면, Nats 2024를 구경 간 것 자체도 모형이라는 작은 틀을 통해 미국의 저력과 힘을 느낄 수 있었던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른바 ‘돈 되는’ 행사도 아니고 오로지 ‘좋아서 하는’ 일일 뿐인데, 자원봉사자들의 노력과 힘이 모여 그 큰 행사를 매년 성대하게 치뤄낸다. 카테고리도 세분화 돼있고, 나름의 규정도 상세하게 정해져있지만, 그것은 이 문화, 이 단체의 오랜 역사와 넓은 저변을 보여줄 뿐이지, 한국/일본의 매뉴얼 문화에서 느껴지는 ‘규정을 위한 규정’, ‘책임회피의 근거’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IPMS/USA 전국대회보다 볼거리가 많은 모형쇼가 많다는 것은 어느정도 사실일 수 있다. 세계 최고의 모형쇼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쇼를 꼭 보라고 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아마추어들의 조직된 열정만으로 그들이 스스로의 문화를 어떻게 풍성하게 만들어가는지 느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미국의 힘이고 역량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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